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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신도 신앙교육의 못자리

    정하상교육회관











    평신도 신앙교육의 못자리

    정하상교육회관

     

    주보성인

    정하상

    바오로

     

     

    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신규(李身逵)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말미암아 신품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정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 가톨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제로 내려가

    숙부인 정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 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후에도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劉召史),

    동생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일 뿐더러

    그 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정하상은 포청에서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때 그이 나이는 45세였다.

     

     

    주보성인

    정하상바오로

    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신규(李身逵)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말미암아 신품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정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 가톨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제로 내려가

    숙부인 정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 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후에도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劉召史), 동생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일 뿐더러 그 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정하상은 포청에서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때 그이 나이는 45세였다.

     

    정하상 약력

    (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주보성인

    정하상

    바오로

    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신규(李身逵)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말미암아 신품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정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가롤로)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제로 내려가

    숙부인 정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 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후에도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劉召史),

    동생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일 뿐더러

    그 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정하상은 포청에서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때 그이 나이는 45세였다.

     

    정하상 약력

    (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성 정하상 상재상서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 상재상서(上宰相書)
    천주교리를 잘 알던 정하상은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정 대신에게 올리는 '상제상서'를 지었다.

    '상재상서'는 2,000여자의 짤막한 글이지만 천주교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고

    박해가 그쳐야 할 것을 주장한 명문이다.

    상재상서(上宰相書)의 구성
    서 론 : 논술 동기
    제1편 : 천주교의 교의 해설
              -1장 천주존재 증명 / - 2장 천주께 나아가는 길 / - 3장 영혼과 내세 / - 4장 천주교의 특징
    제2편 : 천주교 호교 변증
              - 1장 천주는 대군대부(大君大父) / - 2장 성윤리(性倫理)
    결 론 : 천주교 신앙의 자유 호소
              - 1. 천주교는 무해정도(無害定道)의 교 / - 2. 박해철회 호소
    부 록 : 조상제사와 신주 모시는 것에 대한 부당성 제시

    상재상서(上宰相書)의 주요구절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털끝만한 것도 두루가 하느님의 힘입니다.

    낳으시고 기르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하시어 인도해 주십니다.

    죽은 후에 받을 상은 그만두더라도 현재 받고 있는 은혜가 이미 무한하여 비할 데 없으니

    우리가 마땅히 일생을 다하여 어떻게 받들어 섬겨드려야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도리를 한 집안에서 실행하면 집안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한 나라에서 실행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전 세계에서 실행하면 온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정신이 흐려져 깨닫지 못하다가 죽은 뒤에 후회하고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을 끊어버릴 큰 도끼가 앞에 있고 몸을 삶을 큰 솥이 뒤에 있더라도

    굳건히 신앙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들이 해야 할 본분입니다.
    이 몸 또한 머지않아 죽어야 할 몸입니다.

    이렇게 감히 말해야 할 때를 만나서 한번 머리를 쳐들고, 길게 외치지 않고 슬프게 입을 다물고 죽는다면,

    산더미와같이 쌓인 감회를 장차 백대(代)가 지닌다 하더라도 다 풀지 못할 것입니다."

     

    성 정하상

    상재상서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 상재상서(上宰相書)
    천주교리를 잘 알던 정하상은

    천주교를 박해하는 조정 대신에게 올리는

    상재상서를 지었다.

    상재상서'는 2,000여자의 짤막한 글이지만

    천주교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고

    박해가 그쳐야 할 것을 주장한 명문이다.

    상재상서(上宰相書)의 구성
    서 론 : 논술 동기
    제1편 : 천주교의 교의 해설
              -1장 천주존재 증명 

              - 2장 천주께 나아가는 길   

              - 3장 영혼과 내세

              - 4장 천주교의 특징
    제2편 : 천주교 호교 변증
              - 1장 천주는 대군대부(大君大父) 

              - 2장 성윤리(性倫理)
    결 론 : 천주교 신앙의 자유 호소
             - 1.천주교는 무해정도(無害定道)의 교

             - 2. 박해철회 호소
    부 록 : 조상제사와 신주 모시는 것에 대한

              부당성 제시

    상재상서(上宰相書)의 주요구절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털끝만한 것도 두루가 하느님의 힘입니다.

    낳으시고 기르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하시어 인도해 주십니다.

    죽은 후에 받을 상은 그만두더라도

    현재 받고 있는 은혜가 이미 무한하여

    비할 데 없으니

    우리가 마땅히 일생을 다하여

    어떻게 받들어 섬겨드려야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도리를 한 집안에서 실행하면

    집안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한 나라에서 실행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전 세계에서 실행하면

    온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정신이 흐려져 깨닫지 못하다가

    죽은 뒤에 후회하고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을 끊어버릴 큰 도끼가 앞에 있고

    몸을 삶을 큰 솥이 뒤에 있더라도

    굳건히 신앙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들이 해야 할 본분입니다.
    이 몸 또한 머지않아 죽어야 할 몸입니다.

    이렇게 감히 말해야 할 때를

    만나서 한번 머리를 쳐들고,

    길게 외치지 않고 슬프게 입을 다물고 죽는다면,

    산더미와같이 쌓인 감회를

    장차 백대(代)가 지닌다 하더라도

    다 풀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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